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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교 68명 중 68등이었다 |
나는 전교 68명중 68등 이였다 내 고향은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 형편도 안되고 머리도 안 되는 나를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 중학교를 다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다. 1학년 8반 석차는 68/ 68등 꼴찌를 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을 내밀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했는데 꼴찌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보지 못 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간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 공부를 잘했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 가 배.."했다. 명순(아버지)이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 제"했다.
당시 우리 집은 동네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틀 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사람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 집 재산 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여진 것이다. "아부지..."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그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 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려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향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7년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의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부모님 앞에 33년전 일을 사과하기 위해 "어무이...,저 중학교 1학년때 1등은 요..."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께서 "알고 있었다. 그만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고 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 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감히 알 수가 없다.
-전 경북대 총창 박찬석-
★박찬석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진주 농립고를 졸업한 뒤 59넌 경북대 사범대학 지리학과에 들어갔다. 67년 경북대 지리학과 대학원 석사를 거쳐, 미국 하와이대에서 지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71년부터 2004년까지 경북대 지리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94년부터 8년간 경북대 총장에 두 번 선출된다. 이후 2003년 국회에 들어가 국방위 상임위원이 된다. 국회에 있는 동안 자전거로 등원을 했고 자전거 타기 활성화 법안을 의원 입법했다. 그 법안이 전국 자전거타기 붐을 조장했다. 전국자전거연합회 회장과 저전거학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로스쿨 탄생의 산파역이기도 하다. 지난해 5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 지으며 살고 있다.
대학총장에서 국회의원, 이제는 농사꾼으로, 경비원에게 온갖 수모 당하고, 슈퍼주인에게 걸인 취급 받고, 자전거로 국회 출.퇴근하다 별일 다 겪었죠...ㅎㅎ "어릴 땐 고향 싫어 가출도 했었는데... 요즘엔 고향 산청서 농사짓고 살아요"
♣ 자녀의 거짓을 알고도 다그치지 않고, 무언의 말로 용기와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주신 아버지의 모습으로 인해 박찬석 박사님이 오늘날 훌륭한 업적으로 세운 분이 되신 것 같아요~ 지금 당장에 자녀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다 준다고, 부모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다고 다그치기 보다는 지혜롭게 격려의 말과 용기를 주는 건 어떨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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