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이동윤  작성일 2019.06.16  

본도장관박공중양불망비
본도장관박공중양불망비

박중양이 누군가. 1897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 후 1903년부터 1년간 일본의 관료로 지내다 귀국하여 대한제국 관료로 생활했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종군했다. 이후 대구군수 겸 경북관찰사 대행으로 임명되어 대구읍성을 허문 자다.(진주 판관을 겸하면서 진주성곽의 일부도 철거했다). 우리나라 읍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박중양의 읍성 파괴부터였다. 왜 그는 읍성을 없앴을까?

조선시대 거의 모든 군현에는 읍성이 있었다. 읍성은 그 지역의 중심이고 시간과 공간의 상징이다. 그게 사라지면 정체성의 뿌리까지 흔들린다. 외세가 장악하고 지배해도 저항력이 감소한다. 그걸 노렸다. 일제는 조선을 점령한 뒤 강제로 거의 모든 읍성성곽을 무너뜨렸다. 세계 역사 어디에도 점령자가 점령지의 성곽을 모두 무너뜨린 예는 없다. 그만큼 일본의 침략은 치밀하고 끔찍했다. 그 단초가 바로 박중양의 대구읍성 파괴였다. 일종의 샘플링이었다.

엄연히 대한제국 시대였다. 황명도 없이 읍성을 허물었으니 대역의 죄다. 그러나 처형당하기는커녕 승진해서 중앙으로 진출했다. 이미 조정을 친일파가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술국치 때까지 경상북도관찰사와 충청남도관찰사(장관) 등을 역임했다. 그때 공주에 그 비석이 세워진 것이다. 지금까지 온전하게 살아남은 읍성은 낙안, 고창, 해미 딱 세 군데뿐이다... 비석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 앞에 치욕의 내용을 적은 팻말을 심어야 한다. 그래야 분노와 부끄러움과 자각을 배운다. 박중양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고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도 지냈다. 해방 후 친일파로 몰려 반민특위에 기소되었지만 풀려났다. 이완용을 비호하고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던 그는 1959년 86세로 죽을 때까지 모든 호사를 다 누렸다. - 2019. 3. 5. 김경집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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