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 성 일 : 2022.03.02 + 작 성 자 : 이동윤
+ 제     목 : 깨달음은 본래의 나를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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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살아가는 일상의 삶의 이치는 즐거움의 체험 또는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 삶의 바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그 과정은 모두가 똑같다. 요가라 해도 되고, 명상이나 고행, 또는 몰입이나 다른 무엇이라 불러도 무관하다.

기름을 부을 때 기름 줄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고행이고, 명상이며, 몰입이며, 그 과정을 통해 온전한 내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자기, 즉 참나를 아는 것이다. 생명 없는 물건처럼 오래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가령 내 손에 종기가 나서 국소 마취를 하고 배농 수술을 받는다고 해도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상이나 깨들음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이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면목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나 말이다. 참나, 즉 나 자신을 알면 깨달음의 고요한 경지는 저절로 알게 된다. 모든 일상의 삶이 '나 자신을 알기'휘한 것이다.

단순한 지적 알음알이가 아니라 인식의 전면적인 통찰이다. 신통력을 얻고, 복을 구하거나 신비 체험이나 법열을 얻는데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언제나 이차적이며 부수적 효과에 불과하다.

사성제와 삼법인, 연기와 공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선정수행을 통한 명상적 직관(知見)에 의해 통찰하는 것은 다르다. 즉 일상을 통해 안다는 것은 일상적 알음알이와 명상수련을 통한 직관을 동시에 의미한다.

'안다'는 것은 불교적 깨달음이 앎의 깊이의 문제이기 때문에 깨달음을 지나치게 신비화하는 경향을 불식하기 위해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착각과 무지는 좋은 것을 탐하고 궂은 것을 미워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시작은 이렇게 사소하지만, 삶의 모든 번뇌와 고통이 여기서 유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분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또한 이러한 분별에 근거하여 일상적 삶을 살아간다. 문제는 분별 그 자체가 아니다.

분별이 문제되는 것은 우리의 육근이 대상을 지각할 때 개입하게 되는 업력이나 조건 지워진 행위가 만들어내는 문제들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알아차리거나 지각할 때 우리의 그의 경험을 물들이는 경향성 일반을 의미한다.

이런 경험이라는 업력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 상태가 삼매이며, 이를 얻는 과정이 불교수행의 핵심이다. 산란된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집중하여 몰입하는 것이다. 나 자신의 본래 상태는 의식과 무의식의 구별을 초월하고, 마음도 초월한 깨달음의 상태다.

오늘도 흥겹고 행복한 하루 만들어 가시길 빕니다. 이동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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