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마음 자체를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불교적 '삼매'라는 마음을 성성하게 한곳에 집중하는 선정 수행이 좋은 대상이 될 수 있다. 여기에는 어떤 이미지나 물리적 사물과 같은 명확한 내용을 지닌 마음이라는 대상이 없다.
과학의 원리는 모든 지식을 검증하는 것은 실험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실험은 과학적 진리를 판단하는 유일한 심판관인 셈이다. 과학의 실험은 제어되고, 재현될 수 있고, 객관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주의에 주의를 거듭해 집중하는 것을 반복하면 마음이 성성하게 그 자체에 모일 뿐, 생각이든 느낌이든, 마음이 일으킨 어떤 것에 집중한다는 것이 아니다. 수행자들은 삼매라는 선정 수행을 통해 얻은 어떤 결과들을 재현하고 알아듣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결과들은 주관적인, 즉 일인칭의 진술로서 객관화되거나 공공의 영역 안에 있을 수는 없다. 이런 주관적 경험들은 반복될 수 있고, 제어된 것이지만, 관습적인 과학적 대상은 아니다.
과학에서 확고한 회의적 태도와 엄밀하게 제어되고 공개적으로 재현 가능한 실험에 어떻게 전념하는지와 불교적 아이디어의 정당성을 어떻게 입증하는지를 보다 일반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다. 불교와 과학의 관련된 부분들은 현대 물리학을 훤씬 넘어섰다.
이 세상은 어떤 한 가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며, 이와 같은 열린 안목들이 많은 놀라운 반직관적 결론을 낳고 있다. 분별할 수 없는 성질과 위치가 없지만, 세상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비인과적 과정과 시간성을 가진다.
불교는 종교이기 때문에 불교를 창시한 부처님과 그 제자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어떤 주장이 진리인가를 확인하게 될 때, 불교는 경험에 가장 큰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추론은 두 번째 권위이며, 불경은 마지막이다. 불교는 전통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네 가지 의지처가 있다. 첫째가 가르침에 의지하되 스승의 권위에 의하지 말고, 둘째는 의미에 의지하되, 문자에 의지하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명확한 의미에 의지하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애매한 의미에 의지하지 말고, 넷째가 비개념적인 지혜에 의지하되, 이원론적 지식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이 의지처는 과학에서 실험의 역할과 같은 관련이 있다.
네 번째 의지처에 따라 명상에 대한 상세한 지시와 그와 관련된 수행봅에 유념한다면 우리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명성을 실행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부처님께서 전하는 메시지의 진리가 비개념적 경험을 통해 언어의 범주를 초월한 지식에 토대를 둔 진리가 된다.
오늘도 흥겹고 건강하고 행복한 올해 전반기 마지막 하루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