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의 본성은 미래 지향성이다. 항상 미래로 움직여 간다.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자연인 어느 누구도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는 데 아무런 장애물도 없다. 누구도 그런 나를 막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직책의 누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내가 그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려 들면서 아무 것도 아님을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내가 어느 직책의 누구가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자아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것을 증명하는 일은 힘든 길이다.
자연인으로서 우리는 저 세상에 갈 때 옷을 걸칠 수 없다. 그냥 벌거벗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직책의 누구도 죽음의 강을 건널 때는 모든 것을 벗어야 한다. 그때서야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전적으로 아무 아니었고, 어떤 직책도 없었다는 사실을.
죽음이 빼앗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 자연인들은 이미 살아 있을 때 포기한다. 그래서 죽음은 그에게서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다. 죽음의 강을 건너기 전에 자신의 직책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것을 증명하려 애를 쓴다.
왜 그런가? 자신의 눈에 자신이 무이고, 아무 것도 아님을 스스로 알기 때무이다. 그리고 이 아무 것도 아님은 가슴을 파먹는 고통이 된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눈앞에서 그것을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보면서 대중의 의견을 모을 것이고, 그 대중의 의견을 통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런 이미지가 바로 자아상이다. 그것은 진정은 자아가 아니다.
진정한 자아라기보다는 그냥 하나의 투영된 영광 같은 것이다. 그것을 자신의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으로부터 수집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이들을 두려워한다.
정치가들이 대중을 두려워하고, 독재자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포악해지는 이유다. 대중은 언제든지 자신이 주었던 것을 무엇이든 도로 취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은 단지 빌려온 자아일 뿐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두려워한다면 나는 그냥 한 사람의 노예일 뿐 주인이 아니다. 자신을 잠잠하게 한 번 바라보라. 스스로가 자신을 두려워하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는지, 아니면 두려워하지 않는지.
만약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빌려온 직책의 누구가 아니라 자연인 자신으로 오로지 참된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직책의 자아는 다른 이들의 의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자아는 오로지 나만의 확실한 존재이며 나의 것이다.
우리가 놀이를 즐기고 있을 때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증명하려 애쓸 필요가 없어서 평화롭고 편안하다. 놀고 있을 때는 다만 재미를 위해서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놀림을 받았다고 해서 어린 아들과 싸우는 아버지는 없다. 기꺼리 쓰러질 것이고, 그러면 아이는 그의 가슴에 올라앉아 웃으며 '내가 이겼다!'고 말할 것이며, 아버지는 행복한 것이다. 재미로 하는 것에는 패해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다.
오늘도 흥겹고 건강하고 행복한 후반기 둘째주 첫날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동윤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