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귀절 반야심경 49-1]내지무노사(乃至無老死): 이미 무명이 없어져 다하면 죽음 또한 없어진다: 말머리가 끊기면 마음이라 할 것이 없다
불교에서 아상(我相)은 모든 것을 자기 본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여 자기가 가장 잘 났다고 말하거나, 자기 것만 좋다고 고집하거나, 오온(五蘊)의 일시적 화합으로 이루어진 자기 자신을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소견이며, 인상(人相)은 우주 만물 중에서 사람이 가장 중요하며, 일체 만물은 사람을 위해서 생긴 것이므로 사람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인간 본위에 국한된 소견이다.
중생상(衆生相)은 부처와 중생을 따로 나누어 나 같은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고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고 스스로 비하하고 포기하여 향상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소견이다. 수자상(壽者相)은 자기의 나이나 지위나 학벌이나 문벌이 높다는 것에 집착된 소견으로 이런 사상에 사로잡히면 중생이요, 사상을 벗어나야 불보살이 될 수 있다. 사상을 아인사상(我人四相)이라 하는 이유다.
중생들은 뒤바뀐 눈앞의 허깨비 같은 경계에 현혹되고, 평소 습성에 끄달려 모양과 그림자가 바뀌며, 사물을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게 되고, 너다 나다 하는 인아에 집착하기 때문에 망령된 마음이 없어지지 않고, 아득한 무량겁 동안을 인아를 버리지 못하여 빛과 소리에 집착하며 생사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눈앞의 일은 그럭저럭 꾸려 나가지만 그래도 또한 생멸을 면치 못하게 된다.
자기의 참모습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눈앞에 나타나는 경계가 없으며 또한 중생이 없으니 본래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세 마음 사이에 차별이 없다. 평등한 진리의 세계는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리 한바탕으로 같이 보니 만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여기에 이르면 태어나고 늙어가고, 병들어도 그 가운데서 태어나고 늙어가고 병들어 죽어도 그 가운데서 죽게 되는 것이다.
만일 깨달음의 집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나고 죽음이 있음을 보지 않게 되고 또한 생멸이 없게 되니, 천당이나 지옥과 육도의 사생이 모두 허깨비나 꿈같은 것이라 아무 상관이 없게 되어 저절로 온몸을 놓아버리게 된다. 모든 현상은 덧없어 일체가 공한 줄 알게 된다면, 이것이 부처님의 원만하신 깨달음일 것이다. 죽은 뒤 화장되어 연기마저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아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