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 성 일 : 2023.08.18 + 작 성 자 : 이동윤
+ 제     목 : 도대체 어떻게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그것도 모를 수 있을까?
+ 파일첨부 :

서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 친구들, 즉 '나와 너'의 대등한 관계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국회처럼 서로 대립하고 있을 때의 상호 관계는 '나와 그것'의 관계로 단지 지시와 수령만 있을 뿐 진정으로 오가는 대화는 없다.

상대는 '너'가 아니며, 변화되고 나를 믿어야만 하는 하나의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 중요성도 지니지 않으며,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 우정 속에서라야만 상대가 중요성을 가진 존재가 되고,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 '너'가 된다. 우리식의 동지이다.

나는 너를 변화시키고 개조시키려 애쓰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궁극적 존재로 인정하고 대한다. 물건이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되는 것은 삶의 영광 그 자체를 의미한다. 우리는 상대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개조할 수는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을 개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조작하는 대상이 되고, 하나의 수단이며, 그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다. 중국이나 북한 등 공산 전체주의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는 나와 그것의 모습이다.

대화는 '내'가 '너'에게 말할 때, '너'를 사랑할 때, 그 뒤에 어떤 이념도 숨겨져 있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이다. 상대는 다만 사랑받으며, 종교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이런 것이 우정의 의미다. 삶을 논하고 대화가 가능한 친구 관계가 되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더불어 함께 살아가면서도 그런 것을 모를 수 있을까? 더불어 함께 일하고 있으면서도 아무 결과도 이끌어 내지 못할 수 있을까? 존재하는 것을 잊고 마음껏 공간을, 세상을 끝없이 날아다닐 수 있을까?

이론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의문을 제기할 뿐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방법도 단지 대답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의문을 던지는 것은 대답은 이미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단지 대답하기 위해 의문을 제기할 뿐, 진실한 질문이 아니다.

그런 식의 질문은 거짓이며, 답이 이미 정해져 그곳에 있으며, 그런 상황에서의 질문은 단지 형식적 속임수이고, 수사일 뿐이다, 진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물음이 될 수도 없다. 내 마음 속에 이미 정해진 대답이 없어야 진실한 물음이 될 수 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대답으로부터 정해진 질문이 아니고, 단순히 답을 찾고 있는 것일 때 진실한 질문이 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서로 열려 있고, 비어 있고, 상대를 초대하고, 진정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함께 더불어 여러 해 살고 있으면서도 함께 있음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함께 있음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여러 해를 함께 살 수 있다, 우리는 함께 살고 있으며, 삶은 함께 있음 속에서 존재하지만, 그냥 기계적일 뿐 함께 있음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오늘도 흥겹고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만들어 가시길 빕니다. 이동윤 드림

다음글 : 기초대사란 에너지의 사용과 회복이며, 에너지는 활동의 동력이다
이전글 : 삶도 달리기도 핵심은 도전의 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