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거부와 망상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사실이 현실적 진실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늘 보는 익숙한 모습은 범인들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 범죄의 공포에 대처하기 위한 방식으로 거부의 이런저런 형태를 수용해 왔지만 선택적 부인이라는 새로운 관념에 따르면 거부는 깨끗해 보이거나 적어도 처음에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거부가 종종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범인이 자신만의 속도와 자기만의 방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게 해주는 전술이 된다. 이를 통해 범인은 임박한 필멸설에 규정당하며 살기보다는 자신의 정체성 감각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거부가 요양소 같은 제도 안에서 다뤄지는 방식은 그 시대의 더 넓은 사회적 이해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따라서 특정한 추세가 확립되면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통제가 따라올 수 밖에 없게 된다.
3,40년 전만 해도 호스피스 제도가 처음으로 제안되고 수용되고 있을 때 말기 환자들을 간병하는 사람들은 환자가 슬픔의 다섯 단계를 따라갈 것이리고 흔히 예상하고 말해지곤 했다. 환자가 분노에서 수용으로 이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순리라 생각했다.
환자가 그런 단계를 따르지 않을 때느느 올바른 방식으로 죽음을 향해 전진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죽어가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계획 세우기에 참여하라고 압박한다.
그러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삶의 마지막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비관하는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죽음에 대한 거부나 부인을 전복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긍정하는 대화 게임을 통해 친구와 가족이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에 관한 어려운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우리는 죽음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사실을 수용하기 힘들어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어서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죽었다는 현실을 말 그대로 보지 않으려 온갖 짓을 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현실을 직면할 수 없었고, 또 누구에게도 공개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저히 이야기할 수 없는 상징적 행동이 되었을 것이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자신이 직면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즘은 디지털 기법을 통해 죽은 사람을 상징적으로 살려두는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죽기 전에 남겨놓은 녹음으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기도 하며, 망자의 말을 직접 듣는 듯한 착각을 만들어 낸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들음으로써 그 사람이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착각을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어떤 경우든 잃은 것은 엄연히 현실적으로 잃은 것이다. 설사 아니라는 환상을 품는다 해도 말이다. 맹목적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오늘도 흥겹고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만들어 가시길 빕니다. 이동윤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