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바라봄이 좋다. 뭐든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행동을 말한다. 바라보면서 우리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된다. 바라봄을 통해 서로를 느끼게 되고, 현재를 음미하게 되고, 삶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우리 대부분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서로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함께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살아간다는 말이다. 함께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르면서 돌아다니다.
그냥 서로를 조용히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실로 서로를 들여다 보면서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왜 웃음이 나올까? 모든 상황이 부조리하며, 진짜로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너란 존재를 자각하지도 못하면서 존재한다. 우리는 돌아다니며 또 돌아다닌다.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고, 왜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평생을 보내고 있다. 삶은 하나의 신비다. 신비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신비로운 것이 바로 웃음이다. 갓 태어난 어린 아이의 배시시 웃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오직 인간만이 제대로 웃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영광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떤 동물도, 나무도, 풀도 웃지 않는다. 웃음은 오직 우리 인간만이 가진 유일하고 신비로운 요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이성적인 존재라고 정의했지만, 올바른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 이성은 다른 동물에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오로지 정도일 뿐이다. 그리고 그 차이도 심하지 않다. 우리는 오로지 웃고 우는 동물로 정의할 수 있다. 어떤 동물도 우리처럼 감정적으로 울 수 없으며, 웃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양 극단은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신비한 그 무엇이다. 분노는 도처에 존재하며 그것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성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전혀 특별하지도, 그렇게 신비한 것도 아니다. 동물에게 적용되는 모든 삶의 행위들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분노, 공격성, 소유욕, 질투, 모든 것이 동물들에게도 존재하며, 우리보다 더 순수하고 단순하게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생쥐를 이용해 사회 심리 현상을 연구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뒤엉켜 있지만, 쥐들에게는 덜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쥐의 연구에 대해 심리학자들이 어떤 결론을 내리든 우리에 대해서도 진실이며, 우리가 어디를 가나 따라 다니는 동물 또한 쥐들이다. 다른 어떤 동물들도 쥐처럼 어느 곳에서나 살아갈 수 없다. 쥐의 행동은 전적으로 인간을 닮았다.
삶의 신비로움을 발견하거나 경험할 때마다 우리는 울거나 웃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울다가 웃을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고, 하나 일 수도 있다. 신비가 삶에 대한 것이라면 웃음이 대부분이다. 죽음의 신비를 만나면 울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흥겹고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만들어 가시길 빕니다. 이동윤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