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귀절 반야심경45-4] 의반야바라밀다고(衣般若波羅密多故) : 부처님의 신통 변화는 다양하나 오직 하나의 진실, 반야바라밀에 의지한다는 말이다 : 공적영지는 ‘나’라는 느낌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나’라는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 수행방법은 억압적으로 마음을 조절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보고 좋아하거나 싫어할 때 수행하는 사람은 자기가 노여워하거나 기뻐하는 상태를 알고 조절을 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억압하는 것이다. 마음은 한 번에 두 가지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성질이 날 때 염불을 하는 것은 마음을 돌리는 것뿐이지 없애고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므로, 조금 지나 다시 그 생각이 나면 다시 분노가 일어나거나 기쁨이 샘솟는다.
그런데 이 ‘나’라는 생각에 집중하는 방법은 그런 생각을 이용해서 마음을 닦는 것이다. 기쁨이나 생각이 일어날 때 '이 기쁨이나 생각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자기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밀하게 관찰해보면 '나다.'라는 한 생각이 그 뿌리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이 '나다.'라는 한 생각이 없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러면 기쁨이나 슬픔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기쁨과 슬픔이 있어도 잠이 깊이 들면 사라진다.
대상의 집중도 생각의 억압도 아니고 그저 마음이 일어나는 근원을 주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춰서 지혜(智慧)로써 깨닫는 것이다. '아! 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구나' 그래서 마음이 그것에 무심(無心)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도(道)를 먼저 깨달아야 하는 이유는 깨달은 사람은 이치를 아니까 어떤 상태가 왔을 때 일시적으로 속지만 그 상태에 영원히 속지 않게 되어 스스로 한 생각 돌이키면 그대로 마음이 쉬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도(道)를 깨달은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누가 무슨 잘못을 했으면 막 화를 내지만 내고 난 뒤는 끝이다. 하지만 일반 중생들은 '두고 봐.' 이렇게 되는 것이다. 편안하다. 그런데 이것이 편한 사람도 있고 안 편한 사람도 있다. 진정으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이 방법이 매우 편할 것이다. 그런데 남이 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이것도 귀찮다. '아, 내가 그 마음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싫다.'는 사람은 업력(業力)이 아주 많이 붙은 사람이다.
수행 초기에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부터 생각하는 자기로 주의를 돌리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선방에 들어가고, 도반들끼리 몰려다니면서 공부 이야기를 돌을 깨고 갈아 옥을 캐내듯이 학문을 갈고 닦아 지혜를 캐낸다. 이렇게 해야 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이유에 대해서 명확하게 모르면, 다음 생에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성가시게 달라붙어 손해를 끼치거나 상해를 입힐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공부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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