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어떤 행위보다 나 자신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며, 어떤 행위보다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으뜸이 되는 존재를 인식하고 근원적인 차원에서 영향을 미치면서, 동시에 내가 마주하는 고통을 완하시킬 수 있다.
그런 고통의 완화를 통해 행위와 결과의 차원에서도 자비심을 발휘할 수 있다. 배가 고픈 사람이 밥을 한 끼 사달라고 할 때, 나에게 밥이 있다면 그것을 줄 것이고, 없다면 돈이라도 줄 것이다. 그런 상호작용이 그 순간 존재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밥은 그저 상징일 뿐이다. 깊은 치유는 그 안에서 일어난다. 그 순간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없어진다. 모든 악은 무지 때문에 생겨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지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학은 제거되지 않는다.
진정한 변화는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만약 세상에서 고통을 완화시키는 소명을 느끼는 것은 매우 숭고한 일이지만, 외부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해서는 좌절과 실망을 경험할 뿐이다.
우리의 의식의 철저한 변화가 없다면 세상의 고통은 밑 빠진 독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나의 자비심이 일방적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이나 결핍은 도우려는 바람은 '모든 고통은 환상'이라는 근본적인 생명의 본성에 대한 이해와 함께 해야 한다.
현실적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바람과 그 고통의 본성에 대한 이해 사이에 균형이 맞아야 내가 하는 일에 평화가 흘러들고, 원인과 결과의 차원에서 동시에 생명의 본성에 대해 진정 바람직한 영향을 줄 수 있게 된다.
무지에 싸인 사람들이 자신과 사회를 파괴하고 계속 해서 다른 생명체들에게 무서운 고통을 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운동에 참여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둠과 싸울 수는 없듯이 사람들의 무의식과는 싸울 수가 없는 법이다.
만일 그런 노력을 한다면 반대 극성이 더 강해질 뿐이다. 그들은 더 단단히 방어하고, 나는 어느 한쪽에 동화될 것이고, 적을 만들 것이며, 그 결과 스스로 무의식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이다. 내가 아는 바를 퍼뜨림으로써 세상 인식을 높여야 하는 이유다.
적어도 적극적으로는 저항하지 않지만, 내면에 저항, 증오, 부정적 감정을 지니지도 말아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적을 만들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다. 결과에 집착하면 그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다.
현재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는 말이 무엇보다 먼저 내가 무엇때문에 이 세상에 왔는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말이며, 내가 이 세상에 온 것도 크게 보면 나의 생각이나 깨달음을 세상에 펴기 위해서 일 것이 아닌가 말이다.
오늘도 흥겹고 행복한 한 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동윤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