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 성 일 : 2018.05.25 + 작 성 자 : 관리자
+ 제     목 : 사랑이란 분별심이 증오를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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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삶 속에서 순간순간 만나게 되는 많은 일들, 예를 들어 사소한 반찬 하나, 간식 하나에도 이전에 접촉했던 경험에 의지하여 좋거나 그렇지 않은 판단을 이미 내려놓고, 그런 선판단이 기반이 되어 현재의 만남의 양상을 미리 규정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수없이 많이 경험했듯이 동일한 것도 만나는 몸의 상태나 상황적 조건에 따라 쾌감과 불쾌감의 판단이 달라지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만남이 발생하는 양상에 따라 다가온 대상이나 기관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만남 이전에 이미 이건 좋은 것 혹은 나쁜 일이라는 판단이 달라붙은 어떤 대상이 되어버린다면, 실재 발생할 사건에 대해 올바로 판단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안 좋거나 싫은 음식이라 선판단하면 맛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시끄러운 소음이라고 이미 규정한 음악은 왜 그런 음악을 만들었고, 어떤 느낌인지 감지할 가능성도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쁨이 자연적인 범주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한 범주로 독립하게 되면, 실제 접촉이나 만남과 무관하게 실제 만남의 실상을 놓치게 된다.

불교에서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는 세 가지 마음인 탐내는 마음과 노여워하는 마음,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의 삼독심(三毒心) 중 마지막인 어리석음을 의미하는 치(癡)의 기원이 바로 이것이다. 나쁜 사람이라 규정한 사람과의 만남이 좋게 풀릴 리 없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만나기 전부터 나쁜 만남으로 만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좋은 만남이 될 가능성이 어렵다. 그래서 실상을 제대로 보려면 만남이 발생할 때 일어나는 변화의 감수작용을 정확히 주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고 나쁨이란 선판단, 즉 접촉 이전에 내린 '분별'을 내려놓아야 한다. 분별심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판단하거나 분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 선판단을 중단하고, 올바른 분별을 위해 분별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지혜란 이처럼 지금까지의 선판단의 경험을 버림으로써 가능해지는 올바른 판단, 분별심을 버림으로써 가능해지는 정확한 분별이 다. 좋고 나쁨의 감수작용이 자연적인 것이지만, 그런 구별이 이렇게 사태의 실상에서 벗어나 우리를 오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보편적인 분별범주로 독립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접촉에서 발생하는 즐겁거나 불쾌한 느낌이 즐거움을 주는 좋은 것은 계속 가지고 싶어 하게 만들고, 불쾌감을 주는 나쁜 것은 가능한한 아예 피하려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애증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그 결과 '좋고 나쁨'의 순간적 느낌의 판단이 끌어당기는 탐심이나 밀쳐내는 노여워하는 애증의 힘을 발생시켜 만나 보기도 전에 결국 '좋아함과 싫어함'의 결정을 초래하는 분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흥겹고 행복한 하루 만들어가시길 빕니다. 이동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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