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내 삶에 들어와 나를 감동시키고 영향을 주는 것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내 삶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 그들이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나의 개인적인 삶에 들어올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런 것을 흔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한다. '바로 여기에' 인생의 신비와 힘이 있다. 그런 힘이 설령 내가 바라는 것과 상반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서 자비와 돌봄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강력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경험이 될 수 있다. 일부 생리학자들이 말하는 '이기적 유전자'와 달리 돌봄과 자비로 다른 사람들에게 반응할 수 있고 또 그럴 필요도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리심이 바로 그런 자비와 돌봄의 주고받기 반응이 실천이 수반하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더욱 인간적이게 되고 행복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보리심은 우리 모두 안에서 고동치고 있는 바애심의 핵심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감동을 주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자신에게 신의 인격적 능력이라 생각하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하나님의 실재와 만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아마도 가장 근본적인 길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볼 때 관심과 책임감을 느끼고, 또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소중히 여겨야만 하며, 곁코 그것을 나의 것으로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그 정체성을 보호하고 소중히 돌보아야 할 필요가 있음도 느낀다.
다른 사람은 나에게서 돌봄과 책임의 행동을 이끌어낸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 다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해서 행동하는 것에만 찾을 수 있는 현상이다. 부처님이나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실천의 언어다.
우리 존재의 가장 핵심은 명사보다 동사에 훨씬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즉 내가 상상하는 존재가 아니라 활동성이라는 말이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경험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 하느님, 혹은 절대자라는 말이 정말 의미하는 것에 대한 작은 단서조차 얻을 수 없는 이유다. 나의 인생을 가치 있게 하고, 중족시키고, 흥미롭게 해주는 것은 주고 받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즉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아낌 없이 주는 것이고 또한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로 나를 아낌 없이 내어주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 향하는 나의 이런 움직임에서 안에서 느껴지는 신비로부터 받는 것이다
오늘도 흥겹고 행복한 한 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동윤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