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상상하거나 인식하는 마음은 살아가면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지각의 파편들과 기억, 연상, 그리고 예상들을 모아서 하나로 만들고, 그 결과 합성된 대상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 주요한 기능이다.
그런 다양한 마음의 부분 파편들 중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여전히 행동 범위를 한정하는 기준과 보는 눈과 잡고 감각을 느끼는 손을 즐겁게 하는 바탕이 된다. 본래적 형상 없이 기준이 되는 마음이 작용하여 이익이나 손해를 끼친다.
이런 지적 명칭이나 이름짓기가 마음만의 특별한 기능이다. 마음 속으로 느끼는 어려움은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대상들에 독립적 또는 본래적 존재라는 거짓된 특징을 부여하기 때문에 생겨나게 된다.
본래적 존재라는 기만적 전가나 투사 때문에 우리는 그 대상을 텅비고 무상하다고 과대평가하거나 피할 수 없는 실재라고 느껴 그것으로부터 도망간다. 그 결과 독립적 존재라는 거짓된 축과 연결된 고통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판단의 기준이 되는 마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것이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나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독립된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준이든 대상이든 나 자신이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은 변화하거나 발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외부에는 그들의 독립적 본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변화할 수도 없다.
만약 그 기준이 변화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이 기둥이 부식되고, 벼락 맞고, 외부에 계속해서 끌려다닐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닦고 둘러보고 분석해봐도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 모두가 습관적으로 실재하는 현실의 토대라고 믿고 있는 독립적 존재라는 사실은 결코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중관사상, 즉 독립적 존재성이 부정되는 것을 정확하게 식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텅빔, 즉 공(空)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하기 쉽다. 어떤 생각, 어떤 이념에도 사물들과 사람들은 존재하며, 핵심은 그것들이 정확하게 어떻게 존재하고 기능하는가 하는 것이다.
공(空)이 대상과 주관의 모든 차원에서, 내 존재성의 안과 밖 모두 어디에서나 적용된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체로 주관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기보다 대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더 쉽다.
기준이든 바탕이든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 주관성이 부정되고 있는지, 어떤 종류의 자아, 또는 '나'가 문제되고 있는지 분명하게 한정할 필요가 있다. 존재성이 의심될 때 경험을 성찰하고, 거기에 '나'라는 강한 느낌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흥겹고 건강하고 행복한 한 주 시작하시길 빕니다. 이동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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