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며, 그런 미래에 대한 확신이 현재의 의미를 우선적으로 중시하게 한다. 다가올 미래를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미래의 씨앗을 인식하고 구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재림이나 불교의 인연설이 의미하는 바도 우리가 지금 현재를 살아가면서 하고 있는 언행들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어 간다는 말이다. 왜냐 하면 그런 역사가 이루어지는지를 증명하여 주는 곳이 바로 다른 어느 곳도 아닌 현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찾으려는 모든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부분 다른 곳을 찾아 돌아다니며 시간과 열정을 허비한다. 그것이 삶의 가장 어리석고 불필요한 문제이다. 현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미래 계획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계획은 미래의 우리 목표와 성취하기를 원하는 것을 미리 내다보게 함으로써 현재의 여건에서 일하면서 에너지를 제대로 사용하는 데 중요하고 또 도움이 된다. 우리의 미래를 위한 계획도 당연히 현재의 순간의 여건에 맞게 적용되고 또 따라야 한다.
이미 있는 현재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사이에 불이적 관계가 있다면 아직 오지 않는 미래는 이미 있는 현재 안에서 찾아야 하고, 또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너무 지나치게 분명하거나 확고하게 유지되는 계획은 현재의 미래화를 방해할 수도 있다.
어떤 삶이든 미래와 관련이 있는 것은 계획을 세워야 하지만, 그것에 집착하지는 말아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어떤 계획이라도 항상 기꺼이 조정하고, 변화시키고, 때로는 버리거나 기꺼이 잊기도 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 희망을 가질 수는 있지만, 희망이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아니며, 나 자신의 현재의 행위가 그런 불명확한 희망에 근거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미래에 대한 각자가 희망하는 아직 오지 않는 미래가 이미 여기, 이 순간에 있기 때문이다.
나를 지탱시켜 주며, 내가 이미 있는 것으로부터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하는 것은 내가 씨름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의 상황 안에 주어져 있다. 이것은 내가 신뢰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신뢰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우리가 신뢰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도 신뢰하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삶에는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희망할 수 있으며, 실패 속에서도 성공의 기회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희망하고 있는 것을 결코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고, 우리가 희망하는 대로 미래를 결코 통제할 수 없어도 우리는 희망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 그것이 삶의 신비다.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희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늘도 흥겹고 행복한 마지막 달 첫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동윤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