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 성 일 : 2021.03.28 + 작 성 자 : 이동윤
+ 제     목 : 디지털 사회도 아날로그 사회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행동은 디지털, 인식은 아날로그로!
+ 파일첨부 :

디지털에 관한 설명을 하는 어떤 글에 신데렐라에 관한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요정의 도움으로 궁중의 파티장에 찾아간 신데렐라는 자정이 되자 한쪽 유리구두만 남겨두고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왕자님은 신데렐라를 못 잊어 유리구두를 가지고 그 발에 맞는 임자를 한 명씩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노력 끝에 마침내 신데렐라를 찾게 된다.

그런데 과연 현실이라면 그런 방법으로 신데렐라를 찾을 수 있을까? 찾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가령 왕자님은 수많은 관리를 풀어 전국의 소녀들에게 구두를 신겨봐야 할 것인데, 이런 경우 엄청난 시간이 소비된다. 또 구두에 맞는 발을 가진 소녀가 아마 수만 명은 될 것이다. 이들을 확인하는데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1년여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정작 구두의 주인공 신데렐라는 발이 훌쩍 커져 더 이상 그 구두를 신을 수가 없게 될지도 모른다.

만일 신체상의 특징을 기호화하여 분류해 두었다면 신데렐라를 찾는 데 하루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눈동자 색깔, 머리 색깔, 키, 목소리, 발 사이즈, 피부색, 얼굴형, 체형 등이 코드화되어 있다면 신데렐라를 찾는 것은 엄청나게 쉬워진다. 뿐만 아니라 신데렐라를 찾는 데 들어가는 경비와 노력도 엄청나게 절약할 수가 있다. 이처럼 디지털이란 지식에 관련된 여러 정보들을 수량화, 기호화하는 것으로 시간과 경비를 절약한다는 의미에서 경제학적 효율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전적으로 아날로그는 '있는 그대로 모방한다'라는 개념이다. 아날로그는 어떤 수치를 '길이', '각도' 또는 '전류'와 같이 외부적인 원인에 의해 연속적으로 변하는 물리량으로 나타내는 일이다. 자동차의 빠르기를 바늘의 각도로 표시해주는 속도 측정계, 수은주의 길이로 온도를 나타내는 온도계, 상대적으로 얕게 패이거나 깊게 패인 여러 홈들과 바늘의 마찰로 인해 녹음된 소리가 나오는 음반(LP)이 아날로그의 예다.

우리가 자연에서 얻는 신호는 대개 아날로그이다. 이를테면, 빛의 밝기, 소리의 높낮이나 크기, 바람의 세기 등이 있다. 예컨대 아날로그 방식의 TV는 소리, 빛, 전기 등의 파장을 갖는 것으로 디지털 TV보다 자연에 가깝다. 반면에 디지털 TV는 화상이나 음성 신호를 컴퓨터 파일이나 CD에서와 같이 디지털 신호로 바꾼 것으로 아날로그 방식에 비해 선명한 화질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미시적인 자연 현상은 디지털의 개념에 가깝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신경은 신경 다발이 몇 개 자극되는가로 신호의 세기를 느낀다. 더 근본적인 단계에서 양자 역학에서 에너지가 양자화 되어 있다. 다시 말해, 빛의 세기도 알고 보면 광자가 몇 개 들어오는가로 빛의 양을 알 수 있다.

사전적으로 디지털(digital)이란 손가락이란 뜻으로, 라틴어 디지트(digit)에서 온 말이다. 손가락으로 1, 2, 3, 등등을 셀 수가 있다. 그래서 손가락은 0과 1을 이용하는 디지털 방식을 상징한다.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연속적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離散的)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하는 방법을 말한다. 디지털 컴퓨터에서는 모든 자료를 디지털 방식으로 처리한다. 문서와 통계 자료, 그리고 음성 자료나 영상 자료까지도 이산적인 값으로 처리한다. 디지털 자료는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디지털처럼 분류하고 기호화한다는 것은 빠르고 간편하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또한 빠르고 간편하다는 것은 높은 경제적 가치와 이어진다. 그래서 디지털은 최근 많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가치이자 목적이 되어 버렸다. '아날로그'라고 하면 낙후된, 경쟁력이 없는 것을 대변하는 듯하고, '디지털'이라고 하면 새롭고 경쟁력 있는 것을 대변하는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사회는 온통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꾸자는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디지털로 바뀌고 있는 지금 세상은 과연 이전보다 좋아지기나 한 것인가? 강의시간에 가끔 학생들이 핸드폰이 없던 시대에 연애를 어떻게 했냐고 물어 온다. 학생들에게는 핸드폰이 없던 시절의 연애가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다방(옛날에는 카페가 아니라 다방이 있었다.)에서 상대편이 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린다고 말을 해준다.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상대방이 안 오면 그냥 바람맞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해준다.

학생들은 재미있다고 웃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게 웃을 일도 아니다. 이제 핸드폰이 있음으로 해서 무작정 기다릴 수도, 바람을 맞을 수도 없다. 상대방이 어디 있든 연락이 가능하기에 지금이 옛날보다 편해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의 연애가 이전의 연애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전에 학교 앞 서점 유리창에 빽빽이 붙은 메모 용지를 보지도 못한 학생이니 핸드폰이 없는 연애나 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긴긴 과정을 견뎌야 하는 괴로움을 모르면 만남 자체가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법이다.

나는 가끔 디지털보다 아날로그가 좋다는 생각을 한다. 때로 더디 가고, 때로 느리고, 때로 멈추는 것도 빨리 가는 것 못지않게 필요하다. 전자메일보다 때 묻은 편지가, 핸드폰보다 직접 골목길을 돌아 친구 집에 찾아가는 것이 훨씬 따뜻하고 정겹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디지털도 인간다운 따뜻함을 지니기 위해 아날로그의 도움이 필요하다. 디지털만 외치다가 우리 모두는 차가운 기계의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디지털(digital, 수치형) 과 아날로그(analog, 연속형)의 차이점은 신호 처리 방식에 있다. 음성 송수신의 경우, 아날로그 방식은 목소리의 진동에 해당되는 전기 신호로 전달한다. 그러나 디지털 방식은 송신기로 받은 전기 아날로그 신호들이 교환대의 전기 회선 내에서 2진법 숫자들로 바뀌어 부호 형태로 전달된다. 전류 파장의 높이가 매초 수천 번씩 측정되어 1과 0이라는 숫자 부호로 나타나며, 그 다음 전류는 1에서 흐르고 0에서 흐름이 멈추는 일련의 펄스(pulse, 순간 파동)로 전환되어 파장 측정치를 나타낸다. 이른바 펄스 변조 부호다. 이처럼 디지털은 0과 1의 수많은 조합에 의해 다양한 신호 전달 체계를 갖는 데 비해 아날로그 방식은 자연 그대로의 진동, 파동 또는 기계적 동력에 상응하는 신호 체계를 만든다.

그런데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신호 처리 방식의 차이는 단지 통신 기기가 달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낳은 문명과 세계관에서도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서로 다르다. 아날로그 방식에서는 관찰한 그대로, 마치 사진을 찍는 것처럼 사물을 인식한다. 광선이 사물의 영상을 필름에 그대로 비추는 것과 같은 원리다. 아날로그는 현상을 측정하는 데 작은 것에서 큰 부분까지 타당성 여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려야 한다.

반면 디지털은 0과 1, 참과 거짓인지 명쾌한 해석을 내린다. 따라서 디지털은 빠르고 정확하다. 반도체는 이것을 전류의 꺼짐과 켜짐의 신호를 이용해 설계한 것이다. 디지털은 정확한 수치로 전체를 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지만 그것을 관계로 꿰려면 연속적 사고가 필요하다. 바로 아날로그적 사고다. 실무자에게는 디지털식 사고가 필수지만 리더에게는 아날로그식 사고가 필수 조건이다. 1997년 7월 이후 나타난 외국인 투자액의 급격한 감소, 거주자 예금의 급증, 선물 환율 급등, 아시아 지역에서의 일본계 자본 회수 급증 등은 통계상으로도 눈에 띌 정도였다. 우리에게는 금융 위기를 알리는 디지털 신호였던 셈이다. 이에 비해 아날로그 신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거품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아날로그적 태도는 현실과 계속적인 교감을 통해 현실과의 괴리를 최소화하는 데 필요하다.

정보화 시대에 앞서 나가려면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서로 만나야 한다. 이것은 젊은 세대와 중견 세대, 과학과 문화가 만나는 일이다. 광속으로 흘러오는 디지털의 급류에 휘말려 전복되지 않으려면 아날로그의 창조성을 디지털로 계승해야만 한다. 아날로그의 창조력이 디지털 시대로 이어지고, 이것이 새로운 창조와 진보의 원동력으로 작동하도록 하려면, 아날로그의 유연성과 디지털의 속도를 겸비한 새로운 문화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가교(駕轎)를 만들어 디지털에 익숙한 사람들과 아날로그에 익숙한 사람들이 모이게 하고, 만나게 하고, 이들이 함께 활동할 무대를 마련해 주는 일이다.

앞으로 디지털 세상이 본격화되면 아날로그 단계를 거치지 않은 디지털 태생의 문화가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사이버스페이스는 아날로그적인 현실 세계의 ‘덤’이다. 사이버 스페이스가 현실 세계의 ‘덤’인 이유는 우리의 현실에서 아날로그가 중심을 이루며 현실의 권력 관계가 아날로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자와 DNA의 세계는 비트(bit)의 세계보다 우월하다. 원자 없는 비트는 존재할 수 없다. 사이버 스페이스, 네트(net)의 세상, 인터넷, 가상 공동체 등의 담론이 비트의 세상 속에 따로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주지만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런 공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비트와 네트로 엮어지는 새로운 공동체, 이를 이용하는 실제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나 사업하는 방식, 사람을 만나는 방식의 변화만이 사이버 스페이스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진정한 정보화, 디지털화는 정보 단지의 구축이나 PC의 보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아날로그적 삶의 텃밭을 일구고 거름을 듬뿍 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날로그는 디지털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서로 나눌 지식과 정보의 창조 없이 디지털 세상의 도래를 말할 수는 없다. 발빠른 사업가의 수완이나 정치가의 언변 정도로 이루어질 디지털 세상이라면, 그건 진정한 디지털 세상일 수 없다.

진정한 새 디지털 문화를 꽃피우려면 우선 지식을 주입하는 풍토를 벗어나 지식과 정보를 나누는 방식으로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지식을 독점하고 이것을 먹이 주듯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던 과거의 지식 주입식 발상으로부터 지식은 나누어지고 함께 만드는 것이라는 공동체적 인식으로 전환할 때, 우리의 디지털 세상은 한층 더 풍요로운 참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이 정보화의 거센 물결을 헤치고 살아남는 노아의 방주처럼 인류의 구원을 보장하는 복음으로 선전되고 있다. 인터넷 전도사를 자처하는 사람과 조직들이 사방에서 우후죽순처럼 머리를 내밀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변화에 뒤지면 낙오자가 된다고 협박을 가한다. 아이는 어르고 어른은 겁준다. 이런 이중적 캠페인은 진정한 정보화를 이루기보다는 맹목적 정보 의존증이나 무기력한 정보 혐오증이라는 의외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아이들은 컴퓨터에서 그림이 나오고 소리가 들리니까 마냥 즐거울 것이지만 그들이 정보화의 의미를 깨치기에는 우리의 사회 문화적 기반이 너무나도 허술하다. 한편 어른들은 인터넷과 자신의 생활간의 간극을 메우기에는 정보화가 자신에게 왜 필요하고, 자신이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인식 없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형편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정보화에 앞서기 위해 어린아이에게 영어와 인터넷을 보급하자는 발상은 허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네트는 하드웨어일 뿐만 아니라 사용자들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초·중·고등학교에 컴퓨터를 보급한다고 해서, 각 학교에 인터넷 홈페이지가 개설된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정보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홈페이지 숫자가 곧 정보화를 대표하는 척도도 아니다. 주입식 교육이 여전히 판을 치고 답답하고 꽉막힌 교육 체제를 유지하면서 홈페이지를 만들어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터넷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처럼 우리 사회의 부시맨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부시맨에게는 콜라병이 온갖 기능을 다하는 만능 물건이지만 현대인에게 콜라병은 콜라병에 불과하다. 인터넷 문화와 공동체 정신을 도외시한 채 오락과 재미 그리고 수단적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아이들에게 인터넷을 제공해 봐야 정보화의 진정한 효과는 얻어지지 않는다. 딱딱하게 굳은 머리들을 대량 생산해내는 교육 체제가 변화하지 않고서는 인터넷은 여전히 신기한 콜라병에 머물 것이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망하기 싫거든 변해라. 인터넷을 모르면 직장에서 쫓겨날 것이다.”라는 말이 사람들의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터넷은 심리적 부담과 물리적 짐을 안겨주는 괴물 같은 존재이다. 그들에게 정보화와 인터넷은 무서운 존재이다. 아니 인터넷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빌미로 몰려오는 새로운 현실과 이에 대한 발빠른 적응 요구가 엄청난 부담을 안겨준다. 이러다가는 문명과 기술이 안겨주는 심적 부담 때문에 인터넷 메일을 통해 폭탄을 전달하는 디지털 시대의 테러리스트가 출현할 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많은 사람을 디지털 시대의 어다이트로 만들지 않으려면 현재의 겁주기식 정보화 캠페인에서 송두리째 빠져 있는 사람과 공동체를 중심에 세우는 새로운 방식을 추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음글 : 인생에 진짜 중요한 것이 뭔데?
이전글 : 연민, 사랑, 그리고 배려는 종교나 철학적 믿음이 아니라 자연적 감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