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 단지 앞에는 관문 체육공원이 있다. 주 경기장에는 천연잔디구장과 400미터짜리 우레탄 트랙이 스탠드 아래로 깔려 있고 보조축구장, 테니스코트, 게이트볼장, 농구장, 인라인스케이트장, 발지압장, 산첵로, 등 각종 체육시설이 부속으로 마련되어 있어 내가 사는 과천시민들이 즐겨 애용하는 장소였다.
천연잔디구장은 동네 조기축구회팀이나 인근인 안양, 의왕, 산본, 가끔은 서울시민들도 유료로 이용하곤했다. 트랙을 달리며 새벽 달리기 운동을 하노라면 동네조기축구회팀이 편을 갈라 조명탑아래 축구경기를 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월드컵 경기때나 볼 수 있었던 장면이 일상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어서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실갑할 수 있었다. 후보선수나 스탭들이 앉아 있는 지붕달린 벤취도 월드컵 경기때 히딩크 감독이 어퍼컷 세리머니를 날리던 그것과 똑 같은 것이었다.
육상트랙은 내가 소속한 광화문 마라톤클럽의 열성 회원들도 적어도 2주에 한번 수요일은 꼬박꼬박 찾아와서 40미터 인터발훈련을 하며 땀을 뿌리곤 했던 마라톤 매니아들의 기록향상의 산실같은 곳이었다. 내 자신 2002년 동아마라톤대회에서 3시간 23분의 호기록을 작성, 보스턴마라톤출전자격을 얻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전적으로 이 체육공원트랙에서 인터벌훈련으로 속도를 단련했던 덕분이었음을 부인할 길이 전혀 없다.
아침 저녁으로 육상트랙은 무료개방하고 있어 마라톤에 빠진 나는 거의 매일 새벽과 저녁에 거기에 가서 인터벌 훈련도하고 스피드 훈련을 하곤 했다. 지난 4월이었던가. 400미터 트랙을 한 10바퀴 정도 돌고 몸을 덮힌 다음 골문 뒤 여유공간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우레탄 그 합성의 견고한 벽을 뚫고 잔디의 싹이 올라 오고 있었던 것이다. 잔디뿐 만 아니고 어디서 날라 왔는지 패랭이꽃이며 이름을 알 수 없는 들꽃들이 싹을 틔우고 잎과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새벽에 발견한 처절하고 고귀한 생명현상에 아연하여 나는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다. 그 충격은 봄이 다가고 장마가 한창인 한여름에 이르기까지 쉽게 가셔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명현상은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었디. 천연잔디구장을 관리하는데 드는 번거로움과 적지 않은 비용을 감당하기에 게을러 자신없던 과천시 시설관리공단이 천연잔디구장을 다 걷어내고 인조잔디를 깔기로 결정해 버린 것이다.
지난 6월 초 한여름의 석양이 뉘엿거릴 즈음 나는 나무의자로 된 체육공원스탠드 한켠에 앉아 술을 마시며 대책없는 눈물을 짜내고 있었다. 인조잔디를 깔기위한 정지 작업을 하느라 불도저 4대와 패러도저 2대가 잔디를 과감하게 파헤치고 있는 비정함을 바라보며 천연잔디에 삶을 기생하며 싹을 틔우고 잎과 꽃을 피우던 이름 모를 들꽃들의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소리에 가슴이 따거웠다. 그 가녀린 생명현상에 대해 명복을 빌며 안주없는 술을 먹으며 소리없이 눈물을 짜냈다.
편의와 경제에만 익숙한 사람의 생각은 모질기만 한 것이어서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저렇게 생명을 짓밟느니 ... 고함이라도 치고 욕이라도 내뱉을려고 했지만 그냥 슬프기만 할 뿐 목이 매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늘 7월12일 월요일 저녁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시간에 나는 다시 관문체육공원을 찾았다. 한달 남짓한 공사기간을 거치면서 천연의 잔디는 흔적도 없어 졌고 진록과 연록이 차례로 배합된 축구장은 일사분란하고 질서정연한 아름다움을 빗속에서 뽐내고 있었다.
잔디를 밟아 보았다. 인조잔디를 밟아보았다. 생김새도 촉감도 예전의 잔디구장과 그리 다를것은 없었지만 그 푹신함은 일률적인 것이어서 예전의 천연잔디가 주던 안락함과 포근함은 느낄 수 없었다.
다시 조명탑에 불은 켜지고 군데군데 물이 고인 붉은 트랙을 돌면서 바라본 인조잔디구장은 파충류의 피부처럼 미끈거렸지만 예전처럼 생명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단조롭고 규칙적인 기계음처럼 비가 잔디를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나는 대책없는 눈물을 짜냈다. 우리의 삶도 이미 저러한 것이어서 억지로 살아가며 천연의 생명력을 상실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에 빗물에 눈물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만물이 조락한 가을, 그 뒤에 찾아온 황량한 겨울, 천연잔디구장 곳곳이 파여 드러난 붉은 흙들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속에서 잔디와 이름모를 들꽃들은 새 봄을 예비하며 노래하고 있었으리라.
일사분란하고 질서 정연한 인공의 잔디가 어찌 세월을 몸으로 마찰하며 깍여나간 천연의 잔디를 따를 수 있으랴...
거칠게 쏟아지는 빗속의 트랙을 달리며 나는 사라져간 잔디와 우레탄 그 두터운 인공과 합성의 벽을 뚫고 피어 났던 이름모를 들꽃들의 영혼을 弔喪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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