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장어 굽는 저녁 / 안도현
수족관 속 곰장어는 슬퍼서 몸이 길구나
물속을 얼마나 후려치며 싸돌아다녔기에
이렇게 길쭉해졌다는 말이냐
일생(一生)이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그 길이 몇뼘 늘리는 일이었구나
그러나 생(生)을 벗기는 일 또한
가만히 보니 오래 걸리지 않는다
물살이 온몸을 훑으며 지나가듯
껍질은 단숨에 벗겨진다
평생 몸에 두르고 살던 껍질은 거추장스러웠으나
껍질 벗긴 다음에 드러난 알몸은 외려
부끄러운 것, 그리하여 퍼덕퍼덕 몸을 떨다가
곰장어는 자신을 선선히 도마 위에 눕혔을 것이다
간장과 고추장을 몸에 바르고 지금
곰장어는 숯불 위에 올린 석쇠에 누워 있다
더는 꼬리로 바다를 후려칠 필요가 없고
다시는 뜨거운 불 위를 헤엄쳐 갈 일 없는 몸이
발긋발긋 익어가고 있다
하늘로 기어오르려나
포장마차 밖에는 눈보라의 긴 꼬리가
세상 속에다 구멍을 내는 저녁
시집 -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2004년 창비)
(*) 가을이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 겨울의 곰장어 굽는 어느 저녁이 기다려진다.
우리의 일생이 곰장어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겨우 세속의 길이 한 두뼘 늘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살아온 날들은 아예 덧없고 가을 하늘은 눈이 아리도록 맑고 푸르기만 하다.
다시 가을이다. 그리고 곧 겨울일 것이다.
세월은 흘러 이제는 만만치 않은 가격으로 재무장한 포장마차에서는 곰장어 굽는 저녁이 펼쳐질 것이다. 껍질이 벗겨진 알몸으로 길이를 넓히려 몸부린 친 일생을 마감하는 비명이 성긴 눈발 긋는 회색빛 하늘에 제살 태우는 연탄불 연기와 함께 퍼져 올라 갈 것이다.
언제 우리 곰장어 굽는 저녁을 함께 하며 소주 한 잔 하자!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그리고 겨울이 오기 전에...
곰장어를 굽는 것은 살생이 아니다.
지월이 구우면 살생이지만 여명성이 구우면 살생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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