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 성 일 : 2021.07.01 + 작 성 자 : 이동윤
+ 제     목 : 세상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이치가 바로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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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에서건 편안하게 앉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 일상의 삶처럼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한다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행위자라는 생각이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행위를 해야 한다.

환자를 볼 때 '나'란 생각이 없는 것처럼, 에고, 즉 자신이 행위자라는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 행위를 해야 자연스런 삶이라는 의미다. 자아가 없는 상태, 즉 누구나 자신을 행위자로 생각하든 않든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므로 행위는 일어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 즉 카르마는 업의 본성에 관하여는 화엄경(華嚴經) 보살명난품(菩薩明難品)에서 "중생은 4대(四大)로 이루어져 그 안에는 자아의 실체가 없고, 모든 존재의 본성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과보를 받는 것은 업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 업이라는 것도 실체는 없다. 마치 맑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여러 가지이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종자와 밭이 서로 모르지만 싹이 트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많은 새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지옥의 고통이 따로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이와 같이 업은 실체가 없지만 일상을 통하여 선악의 업을 쌓으면 그것이 업인(業因)이 되어 업과를 받는다.

다만 선도 악도 아닌 무기업(無起業)은 과보를 이끄는 힘이 없다. 즉 우리는 신체가 아니며 따라서 행위자도 아니다. 나 자신이 행위자로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행위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떤 행위의 결과에 대해 집착한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말 자체가 행위자가 있을 때만 일어난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행위자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행위자라는 의식이나 생각이 없는 행위를 가리킨다.

아무리 활동적인 삶을 살아가더라도 그런 행위 각각에서 행위자가 없어야 한다.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로 머물러 있는 채로 행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업, 즉 행위가 무엇인지, 그 행위가 누구의 업인지, 누가 업을 짓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을 분석하고 그 진실을 탐구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나'로서 평화로움에 머무르게 된다. 그럼에도 그런 평화의 상태에서 행위는 계속해서 일어난다. 나는 존재하지만 행위와는 관련이 없다는 의미다.

어떤 사람들을 돕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는 그 '나'는 누구인가? 먼저 그 점을 분명이 깨달아 알게 되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풀리게 된다. 그것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이다.

오늘도 흥겹고 행복한 하루 만들어 가시길 빕니다. 이동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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