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웬 일인지 가슴이 헛헛해진다. 알 길 없는 그 놈의 시장기에 시달리느라 단내가 풀풀나는 군입은 늘 궁금하고 속은 시도 때도 없이 출출하다.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결실의 계절이고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풍요의 계절이며 세파에 시달리느라 야윈 영혼을 숙성할 수 있는 사색과 독서하기에 맞춤한 좋은 시절이건만 걸신들린 가슴은 늘 무언가 고프고 아무나 그립다.
만산홍엽, 산마다 골마다 단풍으로 불타오르는 수목의 화려한 '생명현상' 탓일까? 돌아가기 전에 온 몸을 비우고 태워버려야 하는 '살아 있는 것들이 피할 수 없는 덧없음'이란 자연의 엄정한 이치 때문은 아닐까?
단풍 때문에
가을 한철 술에 젖어 살았다.
화양동 계곡 너럭바위에서
계룡산 민박집 층층나무 아래서
함양읍내 선술집에서
마시고 또 마셨다.
혼자서, 여럿이서 노래를 불렀다.
- 앞 남산 황국단풍은 구시월에 들고요
이내 가슴 속 단풍은 시시때때로 든다.
노래를 불러도 가슴이 시리다
젊은 날엔 술기운을 못 이겨
얼굴이 단풍 빛깔이었는데
나이 들면 술기운이
가슴으로 파고 드는걸까
사시사철 붉은 미친 단풍 때문에
내 속의 그 것 때문에
요즘엔 시시때때로
속단풍이 든다.
- 이명수(1945~ ) '속단풍 든다' 전문
그리하여 도처에 불타오르는 그 '흔한' 가을이. 단풍이 시인의 '속내'를 쏘아 터트리는 총의 방아쇠마냥 '시적 질료'는 될 수 있어도 '시적 풍경'은 결코 될 수 없을 터이다. 오히려 '나이 들어 가슴으로 파고드는 술기운'처럼 '시시때때로 드는 속 단풍'이 '시적풍경'이자 시적 인식' 혹은 '시적 진실'이 될 것이다.
가을이면 점토처럼 메말라 '시장기 그득한 가슴'을 적셔 줄 술에 젖어 지내기에 마땅한 곳은 시적 화자가 이야기 한 곳 말고도 참으로 많다.
지금쯤 길마에 시치느라 해진 황소의 목덜미 같은 근골을 드러내고 있을 월출산이 바라다 보이는 오랜 벗 하월곡의 고향 강진군 성전면 진등리 어느 야트막한 깔끄막에 자리를 펴고 앉아 달을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인다면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강진만에 해떨어져 탐진강 맑은 물위로 조용한 노을이 번지고 어둠이 세상을 소리 없이 접수하면 나는 세상의 달이란 달은 다 불러 모을 것이다. 지월(智月)과 휴월(虧月)이 공동 청첩인이 되어 세상의 달이란 달은 모두 ‘중년의 하오’를 힘들게 더듬으며 지나가고 있는 우리의 '덧없는 잔치'에 초대할 것이다. 상월리(上月里), 신월리(新月里), 월남리(月南里), 월하리(月下里), 월송리(月松里), 대월리(對月里), 영월리(永月里), 월평리(月坪里), 월산리(月山里)의 달은 물론 세상의 온갖 달들이 달려오게 할 것이다. 진등(長燈)에 불 밝혀놓고 술항아리에 술 괴는 소리 들으며 달뜬 마음으로 달들을 기다릴 것이다. 세상의 온갖 달들과 함께 마시고 노래하며 춤출 것이다.
장흥 천관산 억새밭은 계면조로 가을을 운다.
득량만 너머 고흥반도 위로 해가 솟으면 아침노을에 황금빛으로 산등성이를 파도처럼 타고내리며 일렁거리는 억새밭이 바라보이는 장흥 천관산 산모롱이 어느 안돈한 주막에 퍼질러 앉아 마시는 술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히게 황홀할 것인가? 바람이 가락을 만들고 억새가 온 몸으로 서걱거리며 ‘우수의 노랫말’을 토해내는 그 계면조의 노래를 타고 헛헛한 가슴을 적셔 내려가는 술맛은 얼마나 새삼스러울 것인가. 해거름에 검기우는 서쪽하늘로 빛을 튕겨내는 억새의 눈부신 춤사위 속에서 갓 태어난 시간들이 익어가고 주막집 대발평상에 걸터앉은 내 발끝까지 땅거미가 깔리면 나는 속 깊은 울음을 까닭없이 삼키나니 두 눈에 맺힌 맑은 이슬 속으로 설핏한 햇무리가 퍼진다.
아! 세상과 사람에 부대끼며 애면글면 살아 온 날들은 늘 그리도 황망하기만 한 것이어서 살아 내어야 할 날들을 장엄(莊嚴)할 수 없구나. 이미 아득하게 흘러 기약조차 할 수 없구나! (200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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