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 박승미
설악을 보고 오셨다는 김 선생님께 얼마나 좋으셨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얘 말도 말아라 나의 가을은 이것으로 끝이다 한 말씀만 던져주셨다 그 말씀 그대로 들고 돌아와 치마폭을 펴놓고 훌훌 털어 보았더니 낮거리를 하자는 줄 알았는지 설악이 불끈불끈 봉우리 봉우리를 내미는데 나는 그만 얼굴이 붉어져서
나의 가을도 이만 끝, 하고 치마폭을 툭툭 털어 버렸다.
(*) 단풍을 "오브제(시적 질료)"로 자연과 혹은 계절과 합일(하나로 합침)하는 시적 화자의 표현이 대담하다. 낮거리... 러브는 꼭 밤에만 해야된다는 오랜 관습과 통념과 개념을 상쾌하게 파괴하고 일탈해 버린 추억의 언어,
낮거리는 늘 생경한만큼 새삼스럽고 그만치 또 짜릿하다. 그러나 나에게 '낮거리'는 햇빛 곱고 하늘 푸르고 높은 가을 낮에 어려운 책을 더듬어가며 읽는 '짓거리'를 말한다. 밤이 길어지는 가을 밤 나는 '에리히 아우어 바흐'의 '미메시스'를 오미구존(五味俱存 :맵고 쓰고 달고 시고 짠 다섯가지 맛을 고루 갖춤)한 아내의 매마르고 시들어 가는 몸을 조심스레 어루 만지듯 겨우 겨우 읽어 나간다. 코끝으로 흘러내리는 돋보기를 계속 치켜 올려가면서...
그러다 긴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도 거른 채 '낮거리'로 계속 읽어 나간다. 미메시스는 오미구존한 아내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 그래서 나는 낮거리라도 해서 읽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마라톤을 하는 나는 비록 단풍에 취한 설악의 봉우리는 아니지만 가을 이면 늘 '불끈불끈 봉우리 봉우리'를 내민다. 이젠 '불끈불끈'은 가끔은 없어져도 좋은 나이가 되었건만 그넘의 지랄같은 지적 호기심을 주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단맛은 신혼때 보다 덜한 것이 확실하지만 비리지만 깊은 세월의 맛이 고루 배인 아내의 몸은 아직도 나를 고혹(蠱惑)하기때문이기도 하다.
아! 이 가을이 다 가기전에 열심히 '낮거리'나 해서 늦동이 같이 제대로 여문 '시(詩) '나 몇편 만들어야 겠다.
어려운 책만 들면 늘 불끈 불끈거리며 나부대는 나에게 이 햇볕 좋은 가을은 '낮거리" 하기에 더 없이 맞춤한 시절인 듯 싶다.
아내가 무슨 감을 잡았는지 갑자기 치마폭를 훌훌 털면서 일어선다.
흘기며 돌아서는 잔주름 곱게 잡힌 간잔지름한 눈꼬리가 아직은 곱다.
갑자기 때아닌 이슬이 눈자위를 때린다.
가을인가 보다.
가을이 깊어가는가 보다. 정말...
|
다음글 : 
이전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