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마라톤 / 정병선
출발은 늘
고적하다
낯선 곳에
혼자
버려진
아이처럼
두려움과 설레임으로
방금 눈 오줌이
또 마렵다
육신을 버려야
자유를 얻음이니
외로움으로
반짝이는 길을
바람처럼
떠나보지만
길이 다하도록
적멸(寂滅)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문득 고개를 드니
옥양목 한폭 널린
하늘은 그리도
푸르고
길마(*)에
시치느라 해진
황소의 목덜미 같은
산등성이를
바람이 휘젓고
지나간다
가슴 조리며
달려온
길들이
잠못 이루며
헤아려 온
시간들이
고장난 기억속으로
낙엽처럼 사라진다.
(*)생과 멸이 없어진 자리에 적멸의 세계가 있고 그 적멸은 곧 즐거움이 된다(生滅滅而 寂滅爲樂 )고 하였으니 마라톤은 나에게 늘 적멸을 찾아 내 몸을 버리며 바람처럼 떠나는 '외로움으로 빛나는' 여정이었다. 그러나 늘 길이 다 하도록 적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내 고장난 기억속으로 애면글면 달려온 길들과 잠못이루며 헤아려 온 시간들을 쌓아 올린다. 저 찬란한 단풍이 낙엽으로 조락(凋落)하고 나면 산들은 앙말라 허연 근골을 드러내며 적멸하리라!
(**)길마: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기 위하여 소나 말 따위의 등에 얹는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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