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권현형
이마 흰 사내가 신발을 털고 들어서듯
눈발이 마루까지 들이치는
어슴푸른 저녁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마루에 나앉아
밤깊도록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설탕을 타 마신 막걸리는 달콤 씁쓰레한 것이
아주 깊은 슬픔의 맛이었습니다
자꾸자꾸 손목에 내려 앉아
마음을 어지럽히는 흰 눈막걸리에 취해
이제사 찾아온 이제껏 기다려 온
먼 옛날의 연인을 바라보듯이
어머니는 젖은 눈으로
흰 눈, 흰눈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초저녁 아버지의 제삿상을 물린 끝에
맞이한 열다섯 겨울
첫눈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며
나는 다가올 첫사랑을 기다리며
첫눈 내리는 날이면
댓잎처럼 푸들거리는 눈발 속에서
늘 눈막걸리 냄새가 납니다
- 시집 <중독성 슬픔>중에서
(*) 첫 눈 내리면 생각 나 즐겨 외는 시 가운데 하나다.
'이마 흰 사내가 신발을 털고 들어서듯 ' 이란 첫행에서 시적 화자는 '눈의 의인화'수법으로 많은 것을 암시하며 '시적 풍경'을 포괄한다. '이마 흰 사내'로 정의 된 아버지 제삿날 저녁에 내리는 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혼'이며 ' '소복 입은 어머니' 이며 ' 돌아 가신 아버지를 회억함에 울컥 치솟는 슬픔'이며 '다가올 첫사랑'이기도 할터이다. 비단 시적 화자뿐만아니라 우리 모두는 '첫 사랑의 배경'으로서 첫 눈 오는 날의 풍경을 떠올리기에 전혀 어색하지 않다. 눈에서 파생되는 이러한 시적 질료들은 모두 '하얀 눈빛'으로 일관된다.
설탕을 타 마셔 달콤 씁쓰레한 막걸리의 이중적인 맛에는 '과거와 미래', '지나간 사랑과 다가올 첫사랑', '슬픔과 기쁨, 기다림의 두 속성- 쓸쓸함과 설레임'이 절묘하게 대비되어 있다.
마시는 막걸리에 취하고 내리는 흰 눈막걸리에 취해 이제사 찾아온 이제껏 기다려 온 먼 옛날의 연인을 바라 보는 어머니의 눈에 설핏한 물기에는 어머니의 '고적한 기다림의 세월'이 고스란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첫눈 오면 우리 어느 시골 주막집 툇마루에 막걸리 한단지 끌어 안고 앉아 작신 취해 볼 일이다. 살 아 온날들을 돌이켜보며 확실치 않은 꿈처럼 희미한 첫 사랑의 낡은 옷자락도 붙잡아 보고 살아 내야 할 날들의 아득함도 더듬어 보고... 막걸리에 취하고 눈막걸리에 또 취하면 두 눈에 어느덧 안개가 서리고...
사그락 사그락 눈처럼 쌓이는 어둠 속에서 우리의 덧없는 시간들도 저물어 가리니...
우리 첫눈 내리는 날에는 그냥 어느 조용한 시골 주막으로 가자. 하릴없이 눈내리는 주막집 마당에서 뛰고 뒹굴며 눈맞이 하는 누렁이 재롱도 보아가면서 막걸리나 흠씬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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