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을 읽다가 우연히 마누라와 탁주(濁酒: 막걸리)를 대련(對聯)으로 쓴 것을 발견하고는 그 절묘한 비유에 무릎을 친 적이 있습니다.
惡妻勝於空房(악처승어공방:악처라도 빈방보다 낫고)
濁酒濃於淡水(탁주농어담수:탁주는 맹물보다 진하다)
마누라와 막걸리, 얼핏 생각하면 어떤 상관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둘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향기가 낯설지 않습니다. 언제 보아도 익숙하며 편안한 체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미모는 아니지만 미색 혹은 백색의 색상(얼굴)또한 지겹지 않아 언제나 어디서나 어느경우에나 추울때나 더울때나 어렵고 힘들때나 기쁘고 즐거울 때나 비록 튀어나지는 않지만 무난하게 잘 어울립니다. 있을 때는 있는 지 없는 지 잘 모르지만 없을 때는 어딘가 허전하여 금방 표시가 납니다.
애써 추키고 흔들지 않으면 조용히 앉아 침묵할 줄 아는 겸손의 미덕도 갖추고 있지요. 속도 넓고 깊어서 함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희생과 인내로 신산한 세월을 묵묵히 견뎌내며 늘 담담합니다.
마누라와 막걸리는 단맛(감:甘),신맛(산:酸),쓴맛(고:苦), 매운맛(신:辛), 떫은맛(삽미:澁味)을 고루 갖추고 있어 그 맛들이 서로 잘 어울립니다. 게다가 적당한 감칠맛과 청량감도 있어 우울한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매력도 있습니다.
마누라와 막걸리에서 얻는 정감을 요약하면 결국은 편안함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래되어 익숙한 것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마누라는 같이 살며 미운정 고운정 모두 담아 살을 부대끼며 공유해 온 익숙한 세월을 품고 있어 언제나 만만하고 편안합니다. 물론 마누라에게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누구 말마따나 남편하기 나름이겠죠. 막걸리도 같습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 맛에는 은은한 편안함이 배여있습니다. 함부로 마셔도 사람을 해치지 않고 쉽게 포만감을 느끼게하여 과음을 예방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흔히들 능력이 없으니 좋으나 싫어나 막걸리 마시고 마누라만 사랑하는 것 아니냐 하는 농담들을 하기도 하지만 생각하기에 마누라와 탁주는 여러가지 제약조건(법적, 경제적, 윤리도덕적 제약)이 주어진 한계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열등한 대체재(代替財)가 결코 아닙니다. 그건 세월과 함께 빚어 온 탁월한 선택이요 삶에서 없어서는 아니 될 훌륭한 보완재일 것입니다. 그 보완재로 우리는 시너지 효과를 얻어 인생을 더욱 의미있고 보람 된 것으로 엮어가는 것은 아닐까요?
더운 여름날 관악산 너머로 뉘엿거리는 진홍색 낙조를 바라보며 마누라와 함께 막걸리를 마시면 참으로 운치와 정감이 있으며 흥이 납니다. 부추전이나 묶은 김치로 김치전을 부쳐 안주를 삼으면 금상첨화이지요!
살아가다가 새롭고 낯선 것에 마음이 잠시 끌린는 것은 호기심의 발로 일 것이나 오래되고 익숙한 것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은근하며 편안하고 만만한 자유와 여유가 있어 좋습니다. 바로 마누라와 막걸리에서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있지요.
그래서 나는 막걸리와 마누라를 즐겨 마시고 또 사랑합니다.
오래되고 익숙하여 만만한 것들이 주는 그 안락한 자유를 만끽하며...
어제는 정월대보름이라 아침에 귀밝이술로 마누라와 함께 막걸리 한잔했습니다.
막걸리의 미덕에 관한 일화 한토막 소개합니다.
조선 시대 중엽 막걸리를 좋아하는 판서 한분이 있었습니다. 좋은 소주 와 약주가 있는데 하필이면 양반체면에 어울리지 않게
막걸리만 드시냐고 자제들이 탓하자 아무말 않고, 소 쓸개주머니 3개를 구해오라 하였습니다. 자제들이 소 쓸개주머니를 구해오자 빈쓸개주머니에 하나는 소주를 넣고 다른 하나에는 약주를 넣고 나머지 하나에는 막걸리를 담아 며칠후 열어보니 소주를 담은 쓸개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있었고,약주를 담은 쓸개는 상해서 얇아져 있었으며 막걸리를 담은 쓸개는 오히려 두꺼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막걸리가 사람의 몸을 보(補)하는 작용을 함을 실증하는 고사입니다.
그러나 과음은 어떤 경우에나 좋지 않겠지요!
항상 즐겁고 건강한 음주생활하시기를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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