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의사들의 ‘첫’ 축제
30년째 거의 매일 아침 달린다는 이동윤 원장. 달리기대회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3일 이른 아침, 그는 또다시 한강 잠원지구 둔치에서 쌀쌀한 공기를 가르며 달리고 있다.
중국의 임제 선사는 말했다 “기적은 땅위를 걷는 것이다.” 기적은 희박한 공기 속이나 물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대지 위를 걷는 것이다. 대지는 너무도 아름답다.
-틱낫한의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 중에서-
시적인 표현을 빌지 않아도 인간이 두 발로 서서 땅을 ‘걷게’ 된 것은 기적이다. 그리고 인간이 ‘달리는 기쁨’을 발견한 것도 그만큼의 기적일 것이다. 사냥감을 쫓기 위해서라거나, 누군가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닌 ‘달리기’ 자체가 목적이 되는 생명체는 아마 몇몇 인간밖에 없을 듯하다.
지난 달 마지막 일요일이었던 27일, 부산 동백섬 입구에는 여느 때보다 많은 마라토너들이 쌀쌀한 기온 때문에 상기된 얼굴로 몸을 풀고 있었다. 이들은 마라톤 클럽 ‘달리는 의사들’에서 처음으로 주최한 제1회 전국의사건강달리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의사와 그 가족들이다. ‘달리는 의사들’은 지난 2000년 10월 창립된, 의사들로 이뤄진 마라톤 클럽이다. 의사들끼리 모여 달려보자는 소박한 꿈이 5년만에 이뤄진 셈이다.
지금 ‘달리는 의사들’의 회장을 받고 있는 이동윤 원장은 벌써부터 “서울, 지역 이렇게 번갈아 가며 일년에 한번 꼴로 모일 예정”이라며 계획이 한창이다.
레이스패트롤로 나서다
이번 행사장소가 부산으로 정해진 것은 ‘남쪽’이니 덜 추울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2월 내내 주말마다 반복되던 한파 예고는 마지막 주말도 피해가지 않았다. 부산역에 내리는 순간, 싸늘한 공기가 서울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번 주로는 동백섬에서 출발해 해운대 해안도로와 달맞이 언덕, 송정고개, 구덕포, 송정해수욕장을 돌아오는 코스. 부산의 이름난 드라이브 코스 중 최고로 꼽히는 곳이니 뛰는 맛이야 남다르겠지만 차가운 바닷바람을 생각하니, 뛰지도 않을 기자의 몸까지 움츠러드는 듯하다.
이동윤 원장을 만나기로 한 곳은 대회 전날의 마라톤 심포지엄 현장. 마라톤과 심혈관 질환, 마라톤 부상의 치료 등 마라톤과 관계된 학술발표가 한창이었다. 홀에 들어서니 진지한 분위기와 돌아가는 프레젠테이션 화면이 여느 학술대회와 다를 바 없지만, 트레이닝복차림의 청중이 적지 않은 걸 보니 확실히 다르다. 김종철 원장이 마라톤 시 달리는 자세와 스트레칭 요령 등을 설명하자 아예 반 정도는 일어나서 따라하기도 한다. 보통의 학술대회와는 사뭇 다른 열기다. 이번 심포지엄에는 ‘레이스 패트롤(race patrol)의 현황과 나아갈 방향’이라는 의제도 발표됐다. 레이스 패트롤은 ‘스키 패트롤’에서 따온 조어. 마라토너들을 대상으로 부상을 방지하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의사들을 일컫는 말이다. 마라톤에 참가하면 본의 아니게 부상당한 참가자들을 돌보는 일이 잦아지면서 의사들이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으로 명칭까지 ‘달리는 의사들’이 직접 만들어낸 것이다. 이동윤 원장은 달리는 의사회 회원들 중 ‘레이스 패트롤’ 경험이 가장 많은 의사다.
달리는 이들을 위한 모임
달리는 의사들이 처음 모임을 꾸렸던 의사 전문 사이트를 떠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의사들만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 사이트 특성상, 마라톤에 대해 문의하는 일반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2001년 레이스패트롤을 시작하고 2년 후, 독자적 홈페이지를 만들어 나온 것도 의사들이 가진 ‘안전한’ 마라톤 방법을 일반인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전공이 다른 의사들끼리 노하우를 공유하려는 것도 있었죠. 그리고 오프라인 모임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마라톤 대회 개최를 생각하기 시작했죠.”
3월부터 열리기 시작하는 무수한 마라톤 대회를 피하기 위해 2월말로 날을 잡았고, 첫해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부산으로 정했지만, 앞으로는 서울과 지역에서 번갈아 가며 대회를 열 작정이다. 이번 대회는 부산광역시 의사회 마라톤 클럽의 손우현 선생 등 부산 지역 의사들이 준비한 것이다. 이 대회에는 ‘달리는 의사들’ 회원들만 참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라톤이 아니라도 달리기를 즐기는 모든 의사들이 참여하는 대회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어때요, 한 5km 달려보는 건?”
이동윤 원장은 의사마라톤 대회를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축제로 만들고 싶다. 이웃 나라 일본에는 30년의 전통을 가진 의사조깅연맹이 있다. 거기서도 총회를 겸해 4월 첫째 일요일마다 대회를 개최한다. 올해부터는 하프마라톤으로 거리도 늘린 상태라고.
“우리가 이번 달이면 모인 지 3년 4개월째가 됩니다. 좀더 시간이 지나면 일본처럼 더 나아질 거라고 믿습니다.”
의사들이 연 마라톤 대회라면 미디어에서 꽤나 좋아할 듯한 아이템인데, 의외로 취재기자가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홍보를 아무 데도 하지 않았단다. 마음 편한 이들끼리 같이 뛰고 얘기하고 ‘한잔하려고’ 만든 자리라 굳이 알리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원장은 취재하겠다고 찾아온 기자에게 “내년에는 서울로 취재하러 오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마라톤은 마음만 있다고, 돈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함께, 있는 대로 순수하게 하는 운동이에요. 그래서 달리는 사람들은 순수하죠. 달리면서 삶의 진리를 알아채는 거죠. 어때요? 한 5km부터 달려보는 건?”
이 원장은 하프코스를 뛸 예정이다.
“하프는 재미있죠. 우린 무리하게 안 뛰어요. 월요일 근무에 지장 없을 정도로만 뛰죠. 5km는 즐겁게 달릴 수 있어요. 힘들면 걷다가 괜찮으면 또 뛰면 되죠.”
그렇게 말은 하지만 마라톤을 시작한 지 8년째, 그의 풀코스 완주기록은 3시간 17분으로 수준급이다.
축제, 시작되다
대회당일, 동백섬 입구에는 이미 의사들이 몸 풀기를 시작하고 있다. 생각보다는 포근한 날씨,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몸을 푸는 의사들도 보인다. ‘포근한’ 날씨라는 것은 ‘달리는 의사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었고, 어슬렁거리며 ‘꺼리’를 찾던 기자에게는 여전히 쌀쌀한 날씨였다. 그러나 달리는 의사들의 얼굴에는 추운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하프코스를 뛰는 주자들이 힘차게 도로를 박차고 지나가고, 10km주자, 5km주자들이 차례로 달리기를 시작한다.
경기 시작 두 시간여가 지나자 하프주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계측요원들의 손길이 바쁘다. 사실, 축제에서 기록이나 순위가 무슨 상관이랴. 기자가 떠나온 뒤, 달리는 의사들은 마음껏 ‘한잔’ 하면서 오늘 달리면서 맡았던 바다의 비린 냄새와 따뜻한 햇살, 그리고 내년 2월말에 있을 두 번째 축제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지 않았을까. ■
글 김민아 기자 licomina@fromdoctor.com
사진 김선경 기자 potopia@fromdoctor.com
(청년의사 주간 - 259 2005-03-07) |
다음글 : 
이전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