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 성 일 : 2025.02.24 + 작 성 자 : 이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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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에 좋다는 요가가 오히려 무대 위에서 추는 발레 공연을 보는 듯 닮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면서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게 되고, 또 글로 쓸 수 있게 되면, 그 수단이 되는 언어 발달과 함께 뇌도 커지고 발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말과 글들이 필요하게 되고, 이를 제대로 가르칠 학교가 필요하게 된다.

그 결과 부처님이나 예수님 같은 선지자들의 지혜의 말들보다 같은 동료 사람들의 삶의 지혜를 듣고 배우기 위해 모여들면서 신앙 중심 의식에서 이성 중심의 시대로, 성직자 중심에서 교수 중심의 시대로 변하면서 드디어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통찰이 나왔다.

이제 21세기 디지털 정보 기술 산업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자칫 경계를 소홀히 하면 과학이, 인공지능(AI)이 새로운 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사람들은 주의 깊게 받아들이고 대응하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지금까지의 삶이 살아갈 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는 것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삶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아야 더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는 알베르트 까뮈의 말을 되씹어봐야 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형이상학적 논리를 찾는 배경에는 더 고차원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암묵적 전제가 있다. 더 고차원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만약 이승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간다면 저승에서는 더 나은 삶이 기다린다는 데 동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이 세상에 환생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불교적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낙지 요리를 먹으며 그 낙지가 죽은 뒤 어디로 갈지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 이외의 존재가 고차원적인 존재로 승격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반면에 우리가 이승에서 쌓은 업을 소멸시킬 수만 있다면 내세에 환생한다는 믿음이나 선한 삶을 살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은 똑같아 보인다. 현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지상의 삶을 초월하고자 하는 욕구들이 있으며, 그 수단이 바로 명상이다.

초월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지상의 삶을 뛰어넘지 못했지만, 아직도 더 수많은 사람들이 지상에서의 현실적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세계 일주보다 유체 이탈을 경험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더 많은 듯하다.

이런 영적 초월 활동에의 관심 속에는 우스꽝스러운 이율배반이 숨어 있다. 요가나 명상 등 참선 수행은 학습으로 체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체득해야 되는 것이라 주장하면서도 서점에 가면 올바른 참선 수행법에 관한 책들이 가득 쌓여있다.

카톨릭에서는 빈민 구제 사업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만, 신부들은 새로운 신자들을 접견한 후 자신의 본분은 사제관을 지키는 것이라며 운전사 딸린 차를 타고 되돌아간다. 코란은 자비와 사랑을 가르치고 있으나 이슬람교는 알라신의 이름으로 자살 폭탄 테러를 부추긴다.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경험을 얻기 위해 자폭하는 일은 오히려 칭송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일들보다는 나처럼 그냥 집에서 아내를 위해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내다 버려주는 일이 더 영적인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흥겹고 건강하고 행복한 2월 마지막 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동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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